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캔터베리 대주교 (문단 편집) === 종교개혁 이전 === * [[캔터베리의 아우구스티누스|켄터베리의 어거스틴]]: 일반적으로 아우구스티누스라 알려진 교부시대 [[아우구스티누스|히포의 어거스틴]]과는 다른 인물이다. 로마 출신으로 서기 597년 [[교황]]에 의해 [[잉글랜드]]에 파송된 초대 캔터베리 대주교. [[천주교]]와 성공회에서 성인으로 본다. 605년에 선종하였다. * 앨프해아흐(Ælfheah): 이명은 '앨피지(Alphege)'. [[앵글로색슨족]] 지배 당시 캔터베리 대주교. 1012년 [[데인족]]([[바이킹]])의 잉글랜드 침략 당시에 포로로 잡혔으나, 자신의 몸값을 마련하기 위해 가난한 이들이 세금을 내게 할 수 없다면서 몸값을 내는 것을 거부, 결국 바이킹들에게 소뼈로 돌팔매질을 당한 뒤 도끼자루에 맞아 순교하였다. 바이킹들은 거룩한 이의 피를 흘리게 하는 것이 불길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천주교]]와 성공회에서 성인으로 본다. * [[토마스 베켓]]: 1118년에 출생하여 1170년에 살해당한 주교이자 종교재판관. [[헨리 2세]] 시절 국왕이 원하는 것보다 죄인들에게 온건한 처벌을 내려 왕의 심기를 건드렸고, (국왕의 직접 명령인지 아니면 수하들의 과잉 충성의 결과인지는 불확실하지만) 헨리 2세의 부하들에게 캔터베리 대성당에서 무참히 살해당한다. 사후 즉시 성인으로 시성되었으며, 천주교와 성공회에서 성인으로 본다. 이후 1531년, 수장령을 선포하며 교회와 관계를 단절하는 등 파격적 행보를 보이던 헨리 8세가 뜬금없이 360년 전에 죽은 그를 역모 혐의로 기소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와 동시에 이의를 제기하고 싶으면 30일 간의 기한을 줄 테니 법정에 출두하라고 했지만 죽은 베켓이 법정에 출두하는 일은 당연히 없었다. 30일 뒤 개최된 궐석재판에서 헨리 8세는 그에게 유죄를 선고한 뒤 캔터베리 성당에 안치된 그의 유골을 불태우고 조문객들이 바친 헌금을 싸그리 털어갔다. [[토머스 스턴스 엘리엇]]의 "대성당의 살인"에도 등장한다. * 토머스 브래드워딘: 신학자로서의 칭호는 '심오한 박사(Doctor Profundus)'. [[아우구스티누스]] 학파의 신학자로 대주교직에 재임한 기간은 겨우 38일에 불과하다(흑사병으로 선종). 사실 천주교 시대에 재임하기는 하였으나, [[존 위클리프]]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고 [[마르틴 루터]] 신학에도 영향을 주었다. 반펠라기우스주의[* Semi-Pelagianism, 구원이 하느님의 은총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맞지만, 그 은총에 [[인간]]이 [[선행]]으로 응답하여야만 완성된다는 주장이다. 신인협동설이라고도 한다. 정통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이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에 경도되어 있던 당시 신학계에 맞서서 구원은 오직 하느님의 은총으로만 주어지는 것임을 강조하였다. 1290년에 출생하여 1349년에 선종하였다. * 레지널드 폴 추기경[* [[메리 1세]] 시절 영국이 천주교로 복귀했던 때. 성공회에는 추기경 직위가 없다.]: 마지막 가톨릭계 캔터베리 대주교. 부제 때 추기경에 서임되고, 20년 후에 주교로 서품됐다. 1556년 착좌, 1558년 선종.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